1.
헤세의 시 <순례자>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토록 사랑스럽던
화려한 세계가 이별을 고한다.
내 설혹 목표를 놓쳤어도
나의 여행은 대담했나니."
2.
20대, 나는 스스로를 '행복유통업자'라 정의했다. 행복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의 곁에 있고, 그의 곁에 있고, 당신의 바로 곁에도 있다. 누구나 눈이 밝아지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리 믿었다. 행복유통업자로서 나는 행복을 제조하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개안(開眼)을 위한 지혜를 나누면 되었다. 한동안 나는 행복의 향유와 공유를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30대 후반이 되면서 나의 일을 행복유통업이라 부르기가 힘들어졌다. 이제는 '불행예방업자'가 된 것 같다. 긍정성을 걷어찬 것은 아니었다. 행복유통업자로 지낼 때에도 밝음은 어두움을 이면으로 가진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듯이 불행예방업자가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인생을 긍정한다. 다만 두 번의 사별 후 삶의 덧없음을 한입 더 베어문 느낌이다. 인생의 쓴맛이 입안에 맴돈다 .
3.
직관적으로도 짐작 가능한 사항이지만, 과학적 검증이 덧입혀지면 더 큰 설득력을 얻는 경우가 많다. 다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 뉴질랜드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교의 데이비드 휴런 교수는 설문조사를 통해 '슬픈 노래를 즐겨듣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슬픈 음악을 유독 좋아하는 이 10%의 사람들은, 분석 결과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공감능력이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신문> 2015년 10월 17일자)
모든 것은 양면적이다. 느긋한 모습이 좋아서 결혼한 배우자는 결혼 생활을 하며 느려터진 행동에 분통을 터트리고, 다정다감해서 결혼했더니 지나치게 예민하여 정신적 피로를 안긴다. 나는 위의 연구 결과에 동의한다. 동시에 슬픈 노래를 즐겨듣는 사람들의 주된 정서가 그리움과 회한인 경우가 많지 않은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한은 현재의 몰입을 방해하는 과잉 정서다.
4.
나는 회한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다. 자격지심 또한 나의 주된 정서다. 회한과 자격지심을 느끼지 말라는 조언은 백번 지당은 말씀이나, '어떻게'를 동반하지 않는 고언들은 선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삶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리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거나 주된 정서를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체념이나 포부 없이 읊조리게 된다. '삶.이. 힘.든. 순.간.에.도. 잘. 살.고. 싶.다.' 강박도 억지도 아니고, 결심이나 자기 격려도 아니다. 삶이 주어졌으니 최선을 다한다는 (적어도 내게는) 자연스러운 화답이다. 으샤으샤 억지 격려가 아니니 절망스러운 일에도 절망하지 않는 수준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가 있을 뿐이다. 나의 마음을 제대로 짚어줌으로 위로하는 작가가 있으니, 헤르만 헤세가 오늘 밤 나의 친구다.
5.
"삶은 무의미하고 무자비하며 어리석지만, 그럼에도 소중합니다. 인간이 자연의 변덕이자 잔인한 장난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스스로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기에 지어낸 착각입니다. 인간의 삶이 결코 새나 개미보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훨씬 단순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가혹함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한탄하는 대신 이러한 절망을 끝까지 맛봄으로써 받아들여야 합니다."
- 헤세가 힐데 쟁어에게 보낸 편지,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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