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이병률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이병률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p. 125, 문학동네
*
소망하여 만나자 했으면서도
만남 이후 겪을 격정적 슬픔이 두려운 그 날.
그런데도 만남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인연
집을 나서면서도 만나지 않길 바라는 슬픔.
바람과 절망을 뒤섞어 예술로 빚어낸 시.
예술이 불러온 소용돌이에 나는 울고 말았다.
지하철에서, 내 방에서,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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