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되어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왜 그런지 잘 몰랐다.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흐릿한 밤이 며칠 계속되면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몸은 피곤에 전다. 긴 잠 속으로 죽은 듯 빠져들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쉽던 일이 더 이상 쉽지 않게 되었다.” - 구본형
분명치 않은 이유라고는 했지만 구 선생님은 ‘모호함’과 ‘불안’이라는 단어로 마흔의 불면을 회상했다. 불면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어느 정도는 불면을 즐겼다. 한밤중에 일어나 음악을 들었고 고독을 즐겼다(그때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때때로 미래를 구상했다(마음 속 가장 먼저 떠오른 모습이 저술가였다).
불면이라는 불청객을 창조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는 선생님의 모습은 부러움과 위로를 동시에 안긴다. 불면증이 안긴 극도의 피곤한 일상을 지내셨으리라 생각하니 일종의 동질감이 먼저 느껴졌다. 글로 표현된 선생님의 불면은 막연한 ‘불쾌감’이나 ‘불안감’이었지 극심한 고통이나 외로움은 아니었다. 같은 불면증 환자로서 그가 처한 불면의 등급(?)이 내심 부러웠다.
불면증에 등급이 있다면 수면의 양과 질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도 감안해야 하리라. (내면의 힘겨움으로만 따지면)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는 경우는 3등급,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음은 2등급이 되겠다. 고통 때문에 잠이 달아났다면 1등급이다. 고민, 불안, 고통의 구분선이 명료하게 존재하진 않겠지만 내게는 선연하게 차이가 느껴지는 세 단어다.
심장이 뛰고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밤을 꼬박 새거나 새벽에서야 잠깐 눈을 붙이는 일은 고역이다. 뜬 눈으로 푸르스름한 새벽을 맞이하는 날엔 하루 종일 몽롱하게 지내게 된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다가 정신을 놓친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치기 일쑤다. 거리를 걷는데도 줄음이 쏟아진다. 요즘의 내 일상이다. 불면의 밤들을 벌써 3개월째 보내고 있다.
잠을 달아나게 만든 고통과 날마다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불면의 원인은 두 가지다. 상실의 슬픔 그리고 원통함이다. 상실의 괴로움이야 여러 번 체험하며 알아(?) 왔지만 억울함을 안고 사는 일이 이리 고통스러운지 미처 몰랐다. 고통에서 헤어나려고 수없이 다짐하지만 매일같이 쓰러지고 패배한다. 하루하루가 링이고 나는 날마다 패하는 권투 선수다.
대개 두세 시에 깬다. 잠이 깨면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다. 뒤척이다가 결국엔 일어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때부터 미명이 밝아오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이 힘들다. 불면으로 맞는 새벽은 괴롭기 짝이 없다. 몹시 피곤하여 몸을 누이지만 눈을 감으면 잠이 달아난다. 온 몸을 몽둥이로 맞은 것도 같고 온 몸이 경직되어 한없이 뒤틀리기도 한다.
아침이 밝아 의식이 깨어나면 몸의 통증도 얼마간 사라진다. 눈이 시리고 몸이 찌뿌듯하지만 새벽의 몸 상태에 비하면 한결 낫다. 다행하게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네 시간 이상을 잔다. 여러 날을 연속으로 4시간 이상씩 잤던 적도 3개월 중 두 번쯤 있었다. 이것이 전부다. 나머지 날들은 괴로운 불면의 밤들이었다. 그제도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의식이 완전히 깨기 전에는 피곤에 전 몸이 따라주지 않고 의식이 깨어나면 마음이 도와주지 않는다. 몸은 불면으로 파김치처럼 시들어 있고 마음은 상실감과 원통함으로 쑥대밭이니까.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기란 아직 요원하다. 오늘 하루의 생존이 우선이다.
계획도 성찰도 무의미하다.
절실한 바람만 있을 뿐.
3개월 후 : 일상을 회복한다.
2개월 후 : 내 삶과 화해한다.
1개월 후 : 상실을 받아들인다.
오늘 :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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