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자연은 인색하다고 불평하오. 타고난 수명이 짧은 데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마저 너무나 빨리, 너무나 신속히 지나가므로 극소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인생을 준비하다가 인생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보편적인 불행이라오. 이에 대해서는 군중과 무지한 대중 뿐만 아니라 유명 인사도 불평을 털어놓았던 것이오."
제정 로마 시대의 철학자요 정치가인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의 첫대목이다. 첫구절부터 와 닿았다. 세네카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나의 인생관과 시간관리론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네카의 생각은 이렇다. 내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의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오. 인생은 충분히 길며, 잘 쓰기만 하면 우리의 수명은 가장 큰 일을 해내기에도 넉넉하지요. 그러나 인생이 방탕과 무관심 속에서 흘러가면, 좋지 못한 일에 인생을 소모하고 나면,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강요에 못 이겨 인생이 가는 줄도 모르게 지나가 버렸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오."
"인생은 충분히 길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지는 못했다. 내 어머니는 서른 아홉에, 학창 시절의 선생님은 사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선생님은 쉰 아홉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분들의 인생도 충분히 길었다는 말인가. 신은 그렇다고 대답할 지라도, 나는 고개를 흔든다. 적어도 '충분히'라는 말은 지우고 싶다.
가슴 한켠에는 인생이 충분히 길다는 생각도 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하는 생각이라니! 가슴은 감정의 탄생지다. 감정이 변하는 것처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열정과 용기가 그윽하게 차오를 때면 인생이 길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무기력과 우울에 젖어 있을 때면 짧은 인생을 덧없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지금의 내 생각은 '짧고 덧없는 인생'에서 '짧지만 의미있는 인생'으로 전환 중이다. 아니, 전환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 노력은 조급하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슬픔에 좀 더 머물러야 한다면 나는 서둘러 떠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필요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행동을 취할 용기가 생겨나고 있는 즈음이다. 어쩌면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모습을 보며 인생무상의 감정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 육체도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 진데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덧없음 그리고 '나도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순 없어' 하는 두려움.
무기력과 두려움에 빠진 내가 용기를 얻은 것은 우연히 손에 잡은 책 덕분이다. 토로이아의 '전사' 헥토르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다. 나는 전사라는 말을 좋아한다. 전사는 '싸움을 하는 병사'를 뜻한다. 병사라는 단어가 단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한다면, 전사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한다. 병사가 수동적이라면 전사는 역동적인 단어다.
니체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전사를 칭송했다.
"만약 너희들이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에서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위한 전사는 되어야 할 것이다. 전사야말로 그 같은 거룩한 과업의 길동무요, 선구자가 되니."
나는 삶과 죽음을 터득한 현자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의 의미를 터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전사는 되고 싶다. 삶과 죽음의 이치 앞에서 헤매이기보다는 의미와 가능성을 향하여 힘차게 모험하고 싶다. 두려움에 떨며 비겁하게 살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운명과 멋지게 싸우고 싶다. 전사 헥토르처럼.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의 결전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관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손에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을 때 했던 말인데, 헥토르가 내게 큰 위로와 용기를 안겨준 바로 그 독백이다.
"운명이 나를 삼킨다. 그러나 나는 싸우지 않고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다음 세대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나는 완성할 것이다. 나는 싸우고 사랑하다가 죽을 것이다."
싸.우.고. 사.랑.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매우 깊이 감동했다. 그리고 가슴에 새겼다.
나는 싸울 것이다. 사실 싸움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아니다. 나는 내 삶의 운명들, 이를 테면 어머니와의 사별과 같은 일들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의 대상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니 내게 싸움이란, 운명을 이기려는 노력이 아니라 연약한 나를 이기려는 노력이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마다 내 삶의 운명과 더욱 쉽게 화해할 수 있을 테니까.
아킬레우스도, 헥토르도 용감한 전사였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사를 연구한 앙드레 보나르는그들의 용기가 서로 다르다고 했다. 아킬레우스는 천성적으로 용감한 사람이고, 헥토르는 배워서 용감해진 사람이다. 소크라세트는 헥토르의 용기야말로 최상급의 용기라고 했다. 두려움을 알고서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이니까. 내가 만약 삶의 용기를 갖게 된다면 그것 역시 상급의 용기이리라. 나는 삶을 두려워했으니까.
나는 사랑할 것이다. 헥토르는 아내와 자식을 사랑했다. 부부의 사랑을 지키려고 했고, 부부의 사랑을 위협하는 전쟁을 싫어했다. 아킬레우스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면, 헥토르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헥토르는 죽는 순간까지 사랑했다. 적장까지도 사랑하고 싶어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의 이름으로 이것 한 가지만 약속하자. 혹시 제우스가 도와서 내가 살아남고 너를 죽인다 해도, 나는 절대로 너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네 몸에서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너의 시신을 그리스군에게 정중히 넘겨주겠다. 네가 혹시 이기더라도 나한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 『일리아스』 중에서
아킬레우스는 거절했다. 반면, 헥토르는 "싸우고 사랑하다가 죽을 "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싸우고 사랑했다. 그리고 죽었다. 전사다운 모습이었고 아름다운 삶이었다. 헥토르의 이야기는 내게 위로를 주었다. 진실하면서도 용맹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서일까. 헥토르는 내게 불평과 두려움을 떨쳐낼 얼마간의 힘도 주었다.
"왜 우리는 자연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는 거죠? 자연은 선심을 썼는데. 인생은 제대로 쓸 줄만 알면 길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 세네카
내게 힘과 위로를 안겨 준 헥토르 덕분에 세네카의 꾸지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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