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중
세월은 빠르다. 그래서 무섭다. 빨라서 무서운 게 아니라, 빨리 지나간 것을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어서 무섭다. 젠장, 왜 무서울까? 죽음이 무서워서다. 어제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죽는 게 무서워. 난 절대 독립투사는 못 됐을 거야. 고문, 죽음이 무섭거든. 나는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의 위험에 빠지면 바로 변절할 거야."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의 웃음 한 귀퉁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다만, 내 영혼의 한쪽 구석에는 이상주의가 숨쉬고 있다. 아니, 구석자리가 아니라 꽤나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숭고한 가치를 위해 고문을 참아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엔 나는 고통을 꽤나 싫어한다. 그러니 내가 실제 숭고한 사람이 아니라, 나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상주의 아니던가! 현실 파악에서는 제대로 무능한.
이상주의가 현실 파악에 무능한 까닭은 어두운 진실에 자주 눈을 감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느 정도는 구원 받은 이상주의자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밝은 진실이든 어두운 진실이든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니까. 나는 시력은 나쁘지만, 진실에는 눈 밝은 사람이고 싶다.
나는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인생이 지닌 두 가지의 불편한 진실을 자주 생각한다. 하나는 인생의 무상함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필멸성이다. 독일의 국민적 인기를 얻은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인생의 무상함이야말로 위대한 문학의 단골 주제란다. 인생의 불확실성, 속절 없이 흐르는 시간의 속도, 인간 이해의 힘겨움 등은 무상함의 여러 모양이다. 하지만 무상함에 대한 최대 공로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나는 분명 죽음이 두렵다.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죽음의 실존을 겪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난 경험이 없는 이들은 아무래도 죽음이 인생의 일부임을 진하게 느끼기가 힘들지 않을까.
나는 죽음을 여러 번 경험했다. 교통사고로, 질병으로, 불의의 사고사로 부모와 스승을 잃었다. 부모님과의 사별, 소중한 스승 두 분과의 사별, 친구와의 사별... 그들의 죽음이 허망한 것은 죽음은 영원한 이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이 두려운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직 내가 태어난 목적을 찾지도, 이루지도 못해서인 것 같다. 삶의 목적은 찾지도 못했다는 말은 너무 나를 낮춘 표현이겠다. 어렴풋이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 것 같다. 삶의 목적에 대한 인식은 자기이해와 더불어 온다. 나는 쓰기 위해 태어났고, 조금 먼저 조금 깊이 알게 된 것들을 전하기 위해 태어났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온전히 삶의 목적을 실현한다고 해서 죽음에 태연해지는 일은 없겠지만, 두려움과 아쉬움의 크기가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
죽음, 죽음, 죽음, 내가 자주 말하는 주제지만 이것에 압도되어 사는 것은 아니다. 잘 살기 위한 자극제로 죽음을 바라보기도 하니까. 나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는 몽테뉴의 말을 일찌감치 이해했다.
2.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김영하는 신간 『살인자의 기억법』에 작가의 말을 달았다. 소설가의 서문이나 에필로그는 드물다. 그래서 반갑다. 반가울 뿐만 아니라 감동했다. 가장 감동한 내용이 위의 짧은 세 문장이다. 나는 그가 고유한 삶의 목적을 이루며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에게 소설쓰기는 '자기 안의 괴물'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는 자기 괴물을 만나 화해하고 세상에 소개시킨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적어도 나는 열광한다. 내 공부의 목적은 인간이해이고, 그의 소설은 인간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주로 인간의 어두운 면들을.
그는 '소설'이라는 랜턴으로 '인간'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다. 일부러 위험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의 일부가 위험이기에 어찌할 수 없이 위험도 불사하겠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모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모험을 통해 찾고자, 이루고자 하는 일은 뭘까? 궁금하다. 나는 그를 작가로서 존경하니까.
그의 아버님께 전화를 걸어 말씀드리고 싶다. "어르신의 아드님, 아주 괜찮은 작가입니다." 내게는 메일이 더 편한데, 어째 메일 주소를 알 수는 없을까? 김영하는 작가의 말을 아버지 이야기로 마쳤다.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내 삶에 아버지라... 35년 동안 그 분 없이 살아 상상조차 안 된다. 그래서 그저 그의 아버지 건강을 빌 뿐이었다.
"고마운 이들이 많지만, 이 소설은 작가 지망생 아들의 재떨이를 매일 비워주신 아버지에게 바치고 싶다. 내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큰 병을 앓으신 후 아직도 투병중이시다. 건강히 오래 사셔서 언젠가 아들이 '꽤 괜찮은 작가'가 되는 날을 보셨으면 좋겠다."
김영하는 왜 '꽤 괜찮은 작가'를 작은 따옴표로 묶었을까? 언젠가 아버지가 당부한 것은 아닐까? "영하야, 이왕 작가가 되었으니 열심히 써서 꽤 괜찮은 작가가 되어라." 따옴표의 이유는 짐작할 뿐이다. 확언할 수 있는 것도 있긴 하다. 나는 김영하를 한국 최고의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꼽는다는 사실.
3.
11월이 되었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이 글은 쓰면서도 시간이 흘렀다. 정신없이 10월이 지났다. 10월 6일 절친의 췌장암 소식을 들었고, 24일 친구는 간까지 전이된 종양을 떼어내는 대 수술을 했다. 10월 내 개인사의 가장 큰 뉴스였다. 단풍 나들이는 확연히 줄었다. 애처부터 계획된 와우들과의 계룡산 산행을 다녀온 것 뿐이니.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는 우승을 향해 힘겨운 행진을 계속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생로병사를 겪고, 사람들의 일부는 자신의 중요한 목적을 향해 전진하다.
시간은 저절로 흐른다. 우리의 수고가 필요치 않다. 생로병사 역시 저절로 찾아든다. 자연스럽게 받이들이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다만 자기 삶의 목적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우리는 능동성을 발휘해야 한다. 비단 능동적인 태도만이 필요하겠는가? 용기를 내어 도전해야 하고, 시간을 내어 성찰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만 머문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릴 줄도 알아야 자기를 더욱 잘 알게 된다.
자기이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드문 것이고, 드물어도 귀하고 좋은 것이라면 노력하여 얻을 가치가 있다. 사실 자기답게 사는 것은 귀하고 드문 것이 아닐지라도 필연적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방식을 거부한 채로 살면 누구나 점점 절박해지고 메말라가고 생기를 잃어버리니까. 김영하는 작가의 말에 제목을 붙였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우리도 한 평생을 살아 이런 제목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내 인생이다."
이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제목을 읽어보라.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30일을 힘차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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