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불성실하게 준비한 학생과 열심히 노력한 학생의 점수 차가 크지 않았다. 선생은 ‘불성실’에게는 훈계를, ‘노력’에는 칭찬을 전해야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험 문제의 변별도가 떨어진데다가 불성실한 학생과 노력한 학생들로 구분되기보다는 한 학생에게 불성실과 노력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한 명 한 명에게 칭찬과 훈계를 모두 주었다. 스스로를 성찰하여 노력했던 대목은 기뻐하고 부족했던 점은 반성하기를 바랐다. “성찰할 때 성실한 대목마저 싸잡아 자격지심의 재료로 삼지 마세요.” 선생의 의도와는 달리, 학생들은 타고난 기질대로 칭찬과 훈계 둘 중 하나만 받아들었다. 시험 준비에 불성실했던 학생, 자격지심을 주된 정서로 느끼는 학생, 어렸을 때부터 잘했다는 말을 충분히 듣지 못한 학생들의 귀에는 훈계만 들렸다. 기분이 나빠졌다. 특히 이번 시험에 최선을 다했던 Y는 기운이 빠졌다. 운 좋게 실력보다 시험 성적이 잘 나온 학생과 항상 스스로를 실제의 자기보다 낫게 여기던 학생들은 칭찬만이 들려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은 시험 난이도 실패에 대해 학생에게 사과했고, 자신이 전한 것의 절반, 다시 말해 칭찬과 훈계 중 하나만을 받아들고 귀가하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난감했다. 나지막한 소리가 선생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성장하는 영혼이라면 누구에게나 노력하는 모습이 발견될 테고, 불성실 또한 누구나의 삶 속에 기거할 텐데...” (끝)
[사족]
1.
누구나 한쪽만을 보기 십상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성찰은 자격지심 또는 자아도취 중 어느 한쪽을 향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자격지심은 겸손하고 자기 성찰적이지만 자신의 내면을 살피느라 상황 파악을 놓친다. 자아도취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전진하게 만들지만 자신의 실수나 타인을 향한 배려에 둔감하다. 최고의 성찰자는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의 노력에 감탄하는 동시에 자격지심을 발휘하여 개선할 부분을 발견한다.
2.
누군가의 최선을 인정하면 그는 더 나은 최선을 창조한다. 반대로 최선인데도 알아주지 못하면 서운해진다. 최악의 경우는 최선을 향하여 나무라는 것이다. 그리되면 Y처럼 기운을 잃는다. 피드백을 할 때, 결과물의 양질을 검토하기에 앞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이를 찾아 그 최선을 인정하고 칭찬해야 한다. 결과물은 사람의 성장에 비례하고, 최고의 피드백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선생은 결과물보다는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과실을 키우는 것은 뿌리니까.
3.
한 개인의 성실이 불성실로 넘어가는 경계를 정확하게 아는 이는 두 사람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제3자는 그저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선생이 자신의 성실함을 눈치 채지 못해도 지나치게 서운해 하지 말자. 훌륭한 피드백을 건네주는 선생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이다. 또한 누구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내면의 성찰을 할 줄 아는 것은 행복이다. 기쁨은 귀한 것이다. 때론 협력함으로, 때로는 독립적으로 창조해야 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