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 한 시가 넘었으니, 이성이 쫑알거리기 시작한다. '어서 자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일 헤르페스 각막염이 재발할지 몰라.' 머리가 마음을 두드렸지만 마음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머릿 속 자야 한다는 생각은 오른쪽 눈에 느껴지는 옅은 이물감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성의 목소리보다 감성의 끌림에 나의 밤을 맡겼다.
넬, 허각, 에픽하이가 내 방에 선율을 채워 주고 있다. 오늘 배송된 책 하나를 펼쳤다. 『소설이 필요할 때』. 표지에는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소설치료사들의 북테라피"라는 문구가 적혔다. 목차가 간단하다.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목차가 하나 뿐이다. "세상 모든 증상에 대한 소설치료법 A to Z".
삶의 상황별로, 무려 751권의 소설을 화끈하게, 제안하는 책이다. 이런 식이다.
- 실존적 분노를 느낄 때 : 헤르만 헤세의 『싯타르타』
- 수치스러울 때 : 캐스린 스토킷 『헬프』
- 방랑벽이 있을 때 : 로렌스 더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이가 아플 때 :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
- 대머리일 때 : 퍼트리샤 콘웰의 『데드맨 플라이』
톨스토이의 장편소설을 읽으며 치통을 치료할 수, 아니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화끈하다. 제안의 유용함을 깊이 따지지 않고, 소설을 권한다. 얼마간의 제안 이유가 있긴 하지만, 소설을 전체적으로 다루기보다 지엽적으로 접근하여 의미를 부여한 식이다. 지나치게 주관적 추천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과의 첫 느낌을 별로였지만, 나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 오랜만에 누리는 새벽시간의 자유와 책을 배달받은 기쁨 덕분이다. 아마도 내일이면, 이 책을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것이다. 그러고 난 후면 이 책의 유익과 한계에 대한 생각 한 덩어리를 갖게 되리라. 그리고 푸념하겠지. 집에 책이 또 한 권 늘었구나. 내가 지낼 공간은 한 권만큼 좁아들겠고.
2.
http://www.kyobobook.co.kr/event/eventViewByPid.laf?eventPid=28388&classGb=KOR&orderClick=44b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방문했다. 첫 화면에서 '테마로 읽는 책' 한 꼭지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인문학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남경태 선생 타계>라는 글귀를 발견한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을 테마로 만들어 관련 책을 엮어 판매하는 인터넷 서점의 상업성에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나의 기질도 아니고, 우선적 관심사도 아니다. 나는 사회학도이기보다 인문학도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사회 주체들 간의 역학관계보다 인간 본연의 삶과 실존의 순간들에 먼저 관심이 간다.
그래서일까,
아...! 나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정신을 차려 선생의 생몰년도를 확인했다.
1961년생...! 이리도 젊으신데, 어찌...!
사인은, 또, 그 놈의 빌어먹을 암이다.
흐느껴 울었다. 노트북 마우스 패드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암을 조금 안다. 얼마나 무서운지, 환자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결국 암에게 무릎꿇은 이들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두 눈으로 보았다. 한달 내내 보았다. 내 사랑하는 친구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 생애 마지막 몇 분 동안, 그가 가슴으로부터 숨을 괴롭게 끌어올리는 모습을 괴롭게 지켜보았다. 그의 앙상한 팔과 뼈가 만져지는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퀭하게 들어간 눈을 바라보며, 그의 머리 맡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경험한 가장 무서운 장면 중 하나였다. 죽어가는 사람이 무서웠던 게 아니다. 친구나 부모는 송장이 되고 나서도 친구나 부모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그것도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 모습을 가족과 친구가 지켜볼 때도 있다는 게 인생일진데, 그 사실이 무서웠다. 잘 모르긴 하지만 남경태 선생도 이처럼 아팠을 테고, 가족들이 그 고통을 지켜보며 울었을 거라는 생각에, 이 밤이 슬퍼진다.
3.
자야겠다. 울고 나니 졸립다. 눈이 아플까 봐 겁도 나고.
생로병사로 이어져가는 삶이 처연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생로병사가 아니라. 生生生 그리고 死라면 얼마나 좋을까.
4.
아침이 밝기 전, 눈을 떴다. 어젯밤에 쓰다 만 포스팅을 열었다. 비공개 상태를 그대로 공개로 바꾸면 포스팅 하나가 올라갈 테지만, 몇 마디를 덧붙여야겠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 전을 떠올려 보니, 나는 책을 몇 장 읽고 인터넷 서점에 들러 신간을 확인하려다가, 어느 성실한 저술가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얼마간은 친구를 잃은 내 처지에 대한 슬픔이고, 얼마간은 선생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리라. 나는 고통의 체험 없이는 연대적 감수성을 키우기가 힘든 이기적 존재다. 정도의 차이가 미세하게 있을 뿐, 우리 모두 비슷할 것이다. 선생의 장례식에 가야겠다. 5만원의 조의금이라도 지참하여, 마지막 가시는 길에 "책 잘 읽었습니다"라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절로 드는 걸 보니, 선생의 저술 열정에 힘과 자극을 얻었었나 보다.
장례식장을 검색했다. 아차! 선생은 이미 23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어젯밤에 소식을 접했을 뿐, 고인이 되신지 이미 5일이 지났다. 선생은 단 한 번의 조문보다 지긋한 애도를 좋아하실 것도 같다. 아쉬움에 대한 나의 합리화인지도 모르지만, 선생의 책을 두어 권이라도 읽고 싶어졌다. 남경태 선생의 친구가 남기신 글을 보니, '남트르'를 만나 뵈었더라면 내가 존경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혼자만의 취미를 가졌고, 어둠이 보편적이라 믿지만 빛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고 언젠가 나도 빛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사실 그는 고독한 실존주의자였는지도 모릅니다. 학부 시절 사르트르를 좋아한 그를 친구들은 ‘남트르’라고 불렀습니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어둠에 포위되어 있는 빛을 생각하고, 빛은 국지적이고 어둠은 보편적이라 이해했던 그는 사람들에게 혼자만의 취미를 권했습니다. 바둑과 기타를 애호한 그는, 그 이유로 완성이 없음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늘어도 최종 단계가 없다는 것, 입문은 어렵지만 완성은 없고 그 과정에서 성취와 즐거움을 맛보는 것, 그게 그가 해석한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존의 정점에 선 그를 저는 자신의 ‘달란트’(재능)를 탕진하지 않고 극한까지 끌어올려 다섯 달란트에 다섯 달란트를 더해 세상에 남기고 간 사람이라고 기억합니다. 소명을 다한 자입니다. 자신의 자질에 성실이 더해 인문학이 무엇인지 대중에게 알려준 사람, 인문학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쓸지를 알려준 사람, 우리 모두에게 각자 빛나는 별이 되어 아름다운 밤 하늘이 되자며 ‘생각’하라고 권면한 사람, 저는 그를 그렇게 기억합니다. >
[전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670835.html]
5.
두달 전, 작고하신 김치수 선생도 떠오른다. 그때도 먹먹했지만, 지금의 슬픔이 진한 것은 두 분의 학문적 우열 때문이 아니다. 내가 남경태 선생님의 책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나는, 책읽기의 위대함을 또 하나 발견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어 그의 떠남에 기꺼이 애도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자기 성장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관계를 맺는 독서라면,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다.
타자의 슬픔에 슬퍼하고, 타자의 기쁨에 기뻐하는 관계가 얼마나 드물고 고귀하던가. 다른 이들의 슬픔에 슬퍼하는 일도, 그들의 기쁨에 기뻐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 것도 같다. 많은 사람들은 타자의 슬픔에는 (동화되지 않으려는 듯) 무관심하고, 기쁨에는 (자기 것이라도 빼앗긴 양) 질투한다. 그래서 살다가 그 고귀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놀랍고 반갑다. 아름다운 사람들, 닮고 싶은 사람들!
그나저나, 지구별 여행을 마치신 당신들은 모두 어디로 가셨을까? 답을 얻기 힘든 질문이니, 나는 좀 더 쉬운 질문에 매달려야겠다. 최고의 지구별 여행을 하기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의 기쁨을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음 뿐만 아니라, 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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