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또 하나의 상실

카잔 2010. 2. 18. 11:15

아마도 지갑을 잃어비린 것 같다.
덕분에 집안을 뒤지느라, 외투 주머니를 확인하느라,
가방의 포켓마다 열어 보느라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확실하게 지갑을 사용한 것은 어제 1시경이다.
이후에 집으로 왔고, 오후에는 강연을 위한 미팅이 있었다.
잠시 집에 들렀다가 다시 저녁 약속으로 나갈 때 지갑이 없어서
그냥 카드만 들고 나왔다. 약속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 후, 잊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지갑의 부재에
놀라며 집안을 뒤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없다.
유력한 분실 후보지인 어제 오후 미팅을 했던 곳, 카페 데 베르에 왔다.

"혹시 분실 지갑 들어온 게 없나요? 제가 어제 지갑을 두고 간 것 같거든요."
라고 물어야 할 터인데,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조급함이 사라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원은 모르겠지만 이런 마음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지갑이 이곳에 있다면 찾게 될 것이고
나도 모르는 곳에 있다면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서두를 게 무어란 말인가!'

아내가 없는 것이 다행이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얼마나 답답할고.
아이고야. 이를 어이할고. 하하하.
웃음이 나온다. 허탈한 웃음이 아니라, 정말 재밌다.

내가 이리 웃으면,
어떤 분들은 '보보님,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갑이 있을 만한 짐작되는 곳이 있겠지, 라는 생각 말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정말 믿는 것도, 짐작 되는 곳도 없다.
만약 이곳 카페 데 베르에 없다면, 찾을 희망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집안을 너무 샅샅이 뒤졌고
어제 내가 지갑을 들고 간 곳은 카페 데 베르 밖에 없다.

희망을 남겨 두기 위해 집안을 설렁설렁 찾을 걸 그랬나?
희망을 살려 두기 위해 카페 데 베르에 묻지 말까?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희망 때문에 묻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이런 일에 무덤덤한 자신이 신기해서 이러고 있다.

지갑을 잃은 상황인데도, (안에 돈이 적은 것도 아닌데도)
20분 동안 책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하다.
뭘까? 이 덤덤함은.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덤덤함과 진한 아쉬움 사이를 왔다갔다 하겠지.)

문득, 지난 해 유럽 여행에서 잃어버린 배낭이 떠오른다.
하하. 만약 오늘의 초연함이 그 상실 예방주사 덕분이라면,
상실의 경험은 두고두고 삶에 도움이 되겠구만. ^^

※ 이 글을 쓰고 나서 등록하기 직전에 카페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분실 지갑 들어온 게 없냐고. 대답은 기대와는 달리 예상했던 대로였다.
지갑에는 뭐가 들었을까? 각종 신용카드와 현금 그리고 참 아쉬운 일도 하나 생각난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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