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가난해지는 법

카잔 2010. 3. 20. 21:03


이모할머니는 오래 전에 물난리를 당했던 일을 들려 주신 적이 있다.
홍수가 마을을 삼켜 버렸고 이모할머니네 집엔 무릎 높이 이상으로 물이 찼단다.
참담함은 물이 빠진 후에 드러났다. 모든 가전제품을 내다 버려야 했고,
흙탕물에 뒤덮였던 가재 도구들은 못쓰게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절망에도 할머니는 꿋꿋이 살아오셨다. 6남매를 키워내시며.
 
지난 해,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붕괴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최첨단 금융상품인 줄은 모르고 그저 은행예금인 줄 알고 투자했다가
2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날려 버린 시골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참이나 안타까웠었다.
노후 자금으로 모았던 전재산을 날려 버린 할머니는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 만큼이나 앞으로의 날들이 험난하게 보였다.

문득, 그 분들이 떠오른 것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는 슬픔과 힘겨움 속에도 행복이 피어오를 수 있음을 말하는 글을 쓰려던 참이었다.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언제나 삶을 축복하고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글을.
어머니와 사별한 이가 어머니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닫는 것처럼

상실과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은 삶의 소중함, 특히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깨닫는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면서 빠리바게뜨에 들러 소보루빵을 하나 샀다.
종종 다음 날 아침에 먹을 4,500원짜리 샌드위치를 사기도 하지만
요즘엔 늘 소보부빵만을 산다.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건너는 것이라 계산도 간단하다.
소보루빵을 외투의 주머니에 찔러 넣는 찰나, (주머니에 쏘옥 들어간다)
한없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 행복한지고. 참 행복한지고.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참 힘겨운 일을 겪었던 3월 초였다.
지진과 같은 일이었고 며칠을 힘겨워하거나 무서워하며 지냈다.
여진이 남아 있는 요즘인지라, 어제 느낀 행복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행복감의 근원은 다름 아닌 소보루 빵 하나와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이 마음을 참으로 풍요롭게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자가 되는 법보다 가난해지는 법을 배웠다.
품위 있고 인격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가난해질 수 있는 법 말이다.
이것은 자기 삶을 제어할 줄 아는 것이고,
가진 것만으로 소비 없이 살아갈 줄 아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삶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품위 있게 가난해지는 법을 알면 경제적 어려움이 닥쳐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부족한 것을 찾기 보다 가진 것에서 의미를 찾으며 독립적인 영혼으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가난해지는 법은 배운 듯 하다.
가난의 미덕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과 부는 그것 자체로는 미덕이 될 수 없다.
가난이든 부든, 좋은 삶의 모양이 될 수 있는데, 사람의 그릇에 달린 문제다.

이번 어려움은 내가 불러들인 것이다. 나쁜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경제적 손실도 속쓰리지만, 그보다는 나쁜 욕심을 오래 품어온 것이 부끄럽고 괴롭다.
이런 내게도 현자는 지혜로운 조언을 들려 주었다.
"가난으로 힘겨울 때 돈을 구하지 말라. 일을 구하라."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니 힘이 생기기도 한다.

마음 속에 힘겨움이 있는데, '행복하자'고 다짐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힘겨움을 초월하려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다. 나는 초연해지기를 원할 뿐이다.
온전한 초연함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하리라.
지금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글로 표현하는 정도가 되었다.
어제는 소보루빵으로, 오늘은 이 글을 쓰는 것으로 평온함을 느낀다.

잔잔한 행복감이 찾아 든다.
힘겨움 사이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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