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외하면, 한가로운 하루

1.

저녁식사 약속과 GLA START 수업을 제외하면 일정이 없는 하루다. 두 개의 일정이나 제외하고서 일정이 없다고 말하는 건 사실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말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저녁에 일정이 두 개나 있고, 수업 준비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눈 앞의 여유가 증발해버리는 느낌이다. 반면 무엇무엇을 제외하면 한가한 하루라는 표현은 마법 같다. 찰나지만, 여유로움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찰나의 여유와 감정을 주무르는 언어의 마법에 열광한다. 열광이라고 쓰니,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내 감정이 과연 '열광'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내 감정을 회의적으로 들여다보는 맛도 일품이다. 열광, 맞다!

2.

나를 보자마자 김밥 아주머니가 외쳤다. "어머 어떡해~! 하나 남겨 두었는데... 오늘은 안 오시나 싶어 방금 팔았어요."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내 손에 천원짜리 주먹밥을 쥐어주시며 그냥 가져가시라며 손짓하셨다. 말릴 수 없음을 직감한 나는 주먹밥을 손에 쥐고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주머니는 매일 지하철 역 입구에서 세 가지 김밥과 주먹밥을 파신다. 나는 거의 매일 김밥을 산다. 두 번을 제외하고 야채 김밥만 샀다. 어제 늦게 나간 바람에 야채김밥이 다 팔려서 참치 김밥을 샀다. 오늘은 참치김밥마저 없었던 것. (눈만 제외하고 목도리로 꽁꽁 감으셔서) 얼굴도 모르는 아주머니신데... 따뜻한 마음에 훈훈한 아침이었다.  

3.

일주일 만에 오른쪽 눈에 이물감이 찾아왔다. 꾸준히 찾아오는 각막염의 증상에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 왔구나! 반가움은 아니다. 일정이 많았던 한 주라 '이번에는 올 만했다'는 이성적 동의다. - 어쩌지? 내일이 와우 수업인데, 최상의 컨디션으로 맞고 싶은, 한 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데... '하필 지금이냐?' 올 것이 왔지만, 올 타이밍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 안 되겠다. 빈도를 줄이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다.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질병의 회복도 없다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 오늘은 자주 자자. 이물감을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로 여기는 것. 신체적 컨디션 유지를 위한 꽤나 괜찮은 표지다. 따끔거리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

4.

설 연휴 때 깨뜨린 갤럭시노트3 액정을 교체했다. 138,000원을 예상했던 액정교체 비용은 151,000원이었다. 124,000원에서 13만원대로 가격 인상이 된 게 지난해 연말이었을 텐데, 그사이 또 인상된 것. 도대체 인상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화가 났지만, 서비스센터 내에는 이유를 물을 만한 대상이 없었다. "액정교체 비용이 또 올랐다면서요?"라고 덤덤히 확인할 뿐이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은 눈에 드러나는 폭력 뿐만 아니라(주관적 폭력)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과 상징적 폭력을 이해하자고 했다. 액정교체 비용 인상의 배경에 대기업의 구조적 폭력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3월에 시간을 내어 인상의 이유를 따져보련다. 배우는 게 있을 것이다.

5.

어제, '문학적 인간'에 관한 내 글이 필요했었다. 폴더를 뒤적였지만, 그 글이 포함된 파일이 없었다. '아, 이것도 날려버렸구나.' <이것이 자기경영이다>라는 제목의 원고였다. '꽤나 완성도가 높은 원곤데...' 절망감과 괴로움이 몰려들었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쥐었다. 나를 달랬다. '어디 이게 한 둘인가. 새롭게 시작하시게.' 다행하게도 딱 필요한 '문학적 인간' 관련 글은 조르바 원고로 송부했었다. <책을 이야기하는 남자>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원고가 있었다. 공유하고 발표한 글들만 이렇게 남았다. 올해는 완성하는 족족 출간하고 포스팅하고 공유하리라. 어제의 다짐에 이어, 오늘 <인문주의를 권함> 프롤로그 퇴고를 마쳤다.